거제도 역사 중에 고려후기(1271년),거제현(巨濟縣) 관청과 관리, 관노 등 일부 백성들이 육지인 진주와 거창 등지로 피난가 살다가 조선초 1422년 세종4년에 환도(還島)하는 불행한역사가 있었다. 이후 조선시대 각종 기록과 많은 사람들은 지금껏 왜구의 침범으로 인하여 피난간 걸로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1270년에발생한 삼별초항쟁이 시작되어 1271년 진도에 있던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게 함락 당한 후, 주력 부대가 제주도로 옮겨간 삼별초는 남해안의 세곡선과 세곡창고를 습격했다. 이에 정부는 거제지역의 사람들이 삼별초 항쟁세력과 연대할 수 있는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 1271년 미리 육지로 소개령을 내렸던 것이다. 본도(本島)안의 속현(屬縣) 및 역(驛)·원(院) 등 총 1000명 정도의 관청 관계자와 노비 등이 거창군 가조현(加祚縣), 진주목 영선현(永善縣) 등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현령은 현의 수령으로, 현의 인구가 1만 명 이상이면 현령을 두고 그 이하이면 현장(懸長)을 두었다. 당시 거제인구는 최소 8000명 이상이었다(수군 인원 제외). 육지로 거제관청을 옮긴 1년 후인, 원종(元宗) 13년(1272년) 11월에는 삼별초(三別招)가 거제현(巨濟縣)에 쳐들어 왔다. 이때까지 남아 거제현민을지키던, 거제현령을 잡아가고 전함(戰艦) 3척을 불태웠다. 이후 중앙에서 파견되던 거제현령은거창군 가조면 거제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초기까지 거제관청이 본도(本島)로 돌아오지못한 이유는 왜구의 침범으로 인한 불안한 정세 때문이었다(150년 간).거제현 관아가 거창현에 더부살이 하여 마치 거제도 본섬에 사람이 살지 않은 것으로 오해 하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육지로 피난 간 거제민은 일부에 불과 했으며 대다수는 그대로 생업에 종사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여러 문헌에서찾아 볼 수 있다(수군진영 포함).
◯ 다음은 1470년,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재직時, 고려 때피난 와서 살다가 조선초기 거제도로 돌아가지 않고 거창군 가조현에 남아 살고 있는, 거제 유민(留民)의 평화로운모습을 보면서, 지나간 거제민의 역사를 상기하며 읊조렸다.
<가조현에서 자다(宿加祚縣)> 김종직(金宗直, 1431~1492)
“가조현은 거창(居昌)의 속현(屬縣)인데, 고려시대 삼별초(三別抄)의 난이있을 때에 거제(巨濟)의 이민(吏民)들이 바다를 건너 이곳에 도망쳐 와서 부쳐 살았다. 그러다가본조(本朝) 초기에 와서는 그들이 옛 고장으로 돌아갔는데, 지금도 이 고을을 거제라부르고 있고, 또 마을 이름도 아직까지 아주(鵝洲)ㆍ송변(松邊)ㆍ오양(烏攘) 등의 칭호를 띠고 있다.”(縣屬居昌高麗三別抄之亂巨濟吏民渡海奔逬于此遂僑寓焉本朝初還其舊土至今號此縣爲巨濟又村名尙帶鵝洲松邊烏攘等稱)
桑柘人居密 농사 짓는 사람이 빽빽히 사는데 空留海島名 공연히섬의 명칭이 남아있구려 溪山共隱逸 계산은은거한 선비들과 함께하고 父老說升平 부로들은태평 성대를 말하네 夜靜豚鳴圈 고요한밤엔 우리에서 돼지가 울고 簷虛月到楹 텅 빈처마엔 달이 기둥을 비추누나 酒醒仍喚燭 술이 깨자촛불을 부르고 보니 方信俗塵縈 이제야속진에 얽혔음을 믿겠네
◯ 당시 거제현(巨濟縣) 연혁(沿革)에 따르면 고려 원종 때의 거제현이 삼별초의 난을 피해 관청(官廳)과 백성을거느리고 가조현으로 옮겨 왔기 때문에 원종(元宗)12년(1272)에 가조현(加祚縣)이라는 명칭을잠시 버리고 거제현(巨濟縣)이라 하다가 조선 세종때 거제현이 본도(本島)로 돌아감에 따라 가조현은 거창현(居昌縣)에 붙여졌다.
원종 12년(1272년)에서 조선(朝鮮) 세종(世宗) 4년(1422년)까지 150년간을 이곳에 머무는 동안 潘氏(반씨), 諸氏(제씨), 申氏(신씨), 玉氏(옥씨) 같은 성씨들이 이곳에 옮겨 살았는데환도(還島)하지 않고 남아 산 사람도 있었으며 또 오랫동안 맺어진 인연으로 함께 거제도(巨濟島)로 옮겨간 성씨들도 있었다. 지금도 가조현과거제도에 동일한 지명이 있다. 수월리, 우두봉, 가조, 아주 등이다. 現거창군 가조면에 살고 있는 옥(玉), 반(潘), 신(申), 제(諸)씨의 뿌리는 거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거창부편(居昌府編)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소(加召,가조현)에 들어온 거제현은 본도(本島)에 있던 속현(屬縣)의 이름을 따라 아주현(鵝州縣), 송변현(松邊縣)을 지금의 거창군 남하면 아주(鵝州)와 남상면 송변리(松邊里)에 두고 가조면(加祚面)쪽에는 본도(本島,거제도)에 있을 때 이름 그대로 마양역(馬壤驛,오양역)을 두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는 거창(居昌), 거제(巨濟), 두 현(縣)을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이라 불렀다.[巨濟萬加祚時以本島內屬縣及驛院等竝僑置千加祚不境鵝州縣在府東十里松邊縣茂村驛南五里島壤驛赤在加祚不西居民至今廼仍稱不松邊驛].
◯ 1274년 1281년 두 차례의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이로 인해 거제도는 다시금 평온을 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난 간 거제현청은 여전히 귀도하지 않았다. 이때 환도시기를놓치는 바람에 다시 왜구가 들끓었고, 조선 1418년 세종1년, 상왕 태종과 세종이 대마도 정벌 후에 거제현 관청을 본도로 옮길것을 공표하여, 세종(世宗)4년 1422년에야거제관청과 피난 간 현민이 옛 섬으로 환원하여, 거제수령을 지현사(知縣事)로 만들었는데 그 뒤에 현령(縣令)으로 고쳤다.(실제조선세종 때 육지에서 환도한 거제현민은 약 400명에 불과했다).